* 찍덕 슬레타 (연하) x 아이돌 미오리네 (연상)
* 상편: https://posty.pe/240u1w
“슬레타, 맛있는 거 먹으러 갈래?”
에리크트가 부드럽게 물었지만 슬레타는 고개를 저었다. 나 잠깐 혼자 있게 해줘. 에리크트는 억지로라도 동생을 데리고 나가야 할지 정말 놔둬야 할지 고민하는 듯하다가, 이내 마음을 정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심각한 거였으면 이유를 정확히 얘기해줬겠지. 요즘은 아이돌 기획사들도 아픈데 무리하게 끌고 나가지 않고 다 나을 때까지 기다려준다더라.”
“으응……. 고마워.”
방으로 돌아간 슬레타는 책상에 앉아 시험 교재를 뒤적거렸다.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미오리네가 활동 중지를 선언했는데 마음이 편안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슬레타의 마음을 술렁이게 하는 건 미오리네의 건강에 대한 걱정뿐만이 아니었다.
나 때문인가?
자신을 보던 미오리네의 표정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자신의 탓인가 의심하게 된 건 공개방송 참여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 츄츄에게서 전해 들은 말 때문이었다. 야, 벌써 너 갈아탔다는 소문 돌더라. 너 알아본 사람이 퍼트리나 보다. 슬레타는 그제야 미오리네에게도 비슷한 오해를 사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쳤다. 절대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없던 그 표정은 배신감이라고 이름 붙이면 딱 알맞았다.
고작 슬레타 한 명 갈아탄 일로 활동을 중지한다고 생각하는 건 섣부른 오만이다. 하지만 슬레타는 미오리네가 자신을 어느 정도 특별취급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팬 개개인에 대해 그다지 언급하지 않는 미오리네가 슬레타만은 꾸준히 신경 써주는 것만 봐도 명백했다. 활동 중지의 이유가 전적으로 오해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악영향은 주지 않았을까. 미오리네가 고작 자신 때문에 그럴 리 없다고 애써 떨쳐버리려고 해도 그 불안은 찐득하게 달라붙어 슬레타를 괴롭혔다.
적어도 미오리네에게 다른 아이돌로 갈아탄 게 아니라고 전달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의 오해 정도야 다시 미오리네를 따라다니게 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아픈 미오리네가 1호팬마저 등 돌렸다고 슬퍼하고 있다고 상상하면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공부에 집중하지도, 잠들지도 못하고 하릴없이 괴로워하고 있을 때, 문득 SNS 계정에 생각이 미쳤다. ‘빨간색 너구리’ 계정을 통해서라면 미오리네에게 DM을 보낼 수 있다. 요즘 공부에 집중한다고 아예 SNS 앱을 삭제해버려서 이제야 떠올랐지만, 지금 슬레타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 중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었다.
앱을 다시 깔고 로그인을 했다. DM 탭을 터치하려던 슬레타는 멈칫했다. DM 탭에 알림이 떠 있었던 것이다.
미오리네가 인기를 얻으며 덩달아 ‘빨간색 너구리’마저 유명해지는 바람에 슬레타는 DM을 닫아놓은 상태였다. 그렇지 않으면 온갖 이상한 연락들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슬레타에게 DM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은 그전에 DM을 주고받았던, 그러면서도 슬레타에게 차단당하지 않은 사람뿐이었다. 그 조건에 들어맞는 사람 중에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슬레타는 황급히 DM 탭을 터치했다.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미오리네에게서 DM이 와 있었다. 대화창으로 들어가 새로 온 메시지를 위에서부터 읽어내렸다.
<무슨 일 있어?> 20XX년 3월 8일
슬레타가 rest 선언을 한 당일에 온 DM이었다. 첫 DM을 나눈 지 약 4년여만의 DM이기도 했다. 슬레타는 좋지 않은 상상이 현실이 되는 기분을 느끼며 DM을 계속 읽어내렸다.
<나 뭐 잘못한 거 있나?> 20XX년 3월 26일
<바쁘더라도 대답 한마디 정돈 해줄 수 있잖아.> 20XX년 4월 16일
몇 주씩 간격을 두고 띄엄띄엄 온 메시지는 어제 새벽에 온 문장 하나로 끝이 났다.
<갈아타려고다씹는거였냐?> 20XX년 5월 11일
출력된 글자만으로도 느껴지는 날 선 기운이 슬레타를 기겁하게 했다. 수기였다면 거칠게 휘갈겨 쓴 필적이었을 듯한 난폭함이 12글자 안에 꽉꽉 들어차 있었다. 슬레타는 황급히 그런 거 아니라고 답변하려 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입력창 대신 조그마한 시스템 메시지가 슬레타를 반겼다. 이 사용자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없습니다. 어……? 당황하여 미오리네의 프로필 사진을 누르자, 청천벽력 같은 문구가 화면을 메웠다. 차단당했습니다.
충격적인 상황에 거의 10분을 DM창과 프로필을 번갈아 누르던 슬레타는 겨우겨우 정신을 다스리고선 츄츄에게 통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서, 선배, 저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뭔데? 갑자기.]
“선배 3일 뒤였나, 아무튼 니카 씨 만나러 간다고 했잖아요……”
니카는 얼마 전 스포츠 의류 광고 모델로 발탁됐고, 며칠 뒤 홍보 차 팝업스토어에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날은 아카시아의 데뷔일과 가깝기도 해서 츄츄 역시 사진도 찍고 약간의 선물도 전달할 겸 그 팝업스토어에 가려고 계획 중이었다. 슬레타는 니카에게 선물을 전달할 때 자신의 편지를 같이 줄 수는 없냐고 부탁했다.
[편지?]
“네, 네. 미오리네 씨한테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어서……. 죄송해요, 그, 무례인 건 아는데. 혹시 편지만 덩그러니 주기 뭐하다면 어떻게 작은 선물이라도…….”
[야, 네가 지금 돈이 어디 있냐. 그냥 편지만 보내.]
니카 몫도 아닌 다른 멤버의 선물을 전달해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예의에 맞지 않는다는 건 알았지만 이것밖에 답이 없었다. 슬레타의 목소리에서 절박함을 읽었는지 평소라면 거절했을 츄츄도 무던하게 승낙을 돌려주었다.
[말은 전달해볼게. 근데 정말 공주님한테 전해질지는 나도 장담 못한다.]
“네, 고마워요! 다음에 밥 한 끼 살게요!”
[돈 없어서 콘서트도 나한테 돈 빌려서 가는 주제에…….]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인다. 아무튼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츄츄도 미오리네의 소식을 듣고 슬레타를 걱정했던 것 같다. 그 마음씨가 고마우면서도 슬레타는 자신이 걱정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보이지 않던 팬이 다른 그룹을 찍고 있으면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킬지 슬레타가 먼저 고려했어야 했다. 자신의 게으른 무지가 미오리네를 상처 입혔다고 생각하니 외딴 산골에 귀양이라도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작 물 건너간 공부에 미련을 버린 슬레타는 그날 밤 미오리네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자기 사정을 간략히 설명하고, 아직도 미오리네를 너무 좋아하며, 절대 갈아탄 게 아니며, 미오리네가 얼른 쾌차하길 바란다는 요지의 글이었다. 슬레타가 거의 읍소하듯 글을 적어 내렸기에 편지는 어느샌가 두 장이 되고, 세 장을 넘어, 다섯 장에 도달했다. 슬레타는 5장에 이르는 편지를 잘 접어 경조사용 무지 봉투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딱풀로 깔끔하게 봉한 후 검은 붓펜으로 祈完快라고 썼다. 마음 같아선 고두사죄(叩頭謝罪)라고 쓰고 싶었으나 어쨌건 1순위로 중요한 건 미오리네의 건강이다. 부디 잘 전해지길……. 슬레타는 편지 앞에 손을 모으고 기도까지 했다.
어영부영 3일이 흘렀다. 그동안 공부에도 아르바이트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시간만 보내던 슬레타는 니카의 팝업스토어 방문 당일이 되자 종일 츄츄의 연락만 기다렸다. 마침내 그날 저녁 츄츄에게 연락이 왔을 때, 슬레타는 거의 고함을 지르며 전화를 받았다.
“츄츄 선배?! 어떻게 됐나요?”
[소리는 왜 지르냐? 뭐, 전달은 했어.]
고맙다고 말하려는 찰나 츄츄가 망설이며 말을 늘였다. 근데……. 얌전히 다음 말을 기다렸으나 핸드폰 너머의 츄츄는 표정이 보이지 않음에도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슬레타는 불안해졌다.
“왜 그러세요?”
[음…, 너 잠깐 나올 수 있냐? 여기가, 그러니까……. Y역 2번 출구야.]
뜬금없는 호출이었다. 슬레타의 사정을 잘 아는 츄츄는 최근 슬레타를 불러내는 일이 거의 없었다. 불러내는 의도가 짐작되지 않아 ‘왜요?’하고 되물었지만 ‘와보면 알아’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두루뭉술한 답변은 불안감만 증폭시켰다. 약속 장소 역시 슬레타의 집과도, 츄츄의 집과도 그다지 가깝지 않은 곳이었다. 슬레타가 불안해한다는 걸 눈치챘는지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건너왔다. 나쁜 짓 하려는 거 아니고 네 편지 전달 관련으로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옷을 챙겨입고 나가려는 슬레타를 발견한 에리크트가 어디 가냐고 묻는다. 슬레타는 에리크트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화면에는 츄츄가 네 언니한테 말할 핑계로 쓰라고 부러 보내준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미오리네가 아파서 상심한 슬레타에게 밥이라도 한 끼 사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에리크트는 그걸 보고 기분 잘 풀고 오라며 돈까지 넉넉하게 쥐여 주었다. 머리 한구석에서 죄책감이 손을 들며 자기 존재를 주장했다. 츄츄가 이렇게까지 해서 불러내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았다면 슬레타는 그 죄책감을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Y역 2번 출구에 도착한 슬레타는 어렵지 않게 분홍색 솜사탕 머리를 찾을 수 있었다. 어딘가 불편한 기색으로 계속 주변을 살피던 츄츄는 슬레타를 발견하자마자 손짓으로 얼른 오라며 재촉했다. 그런데 츄츄는 혼자가 아니었다. 슬레타는 츄츄의 옆에서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와 선글라스까지 쓴 여자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대화를 나누기 적합할 정도로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모자 쓴 여자 쪽도 슬레타에게로 다가온다. 누구시냐고 묻기도 전에 여자가 마스크를 살짝 내리며 선글라스를 벗었다.
“안녕하세요, 슬레타 씨.”
슬레타는 왜 츄츄가 주위를 살피고 있는지 곧장 이해했다. 동그랗고 파란 눈. 모자 아래로 보이는 푸른 계열의 투톤 헤어.
“니, 니카 씨?!”
“야, 목소리 낮춰.”
츄츄가 불안해하며 옆구리를 쿡 찔렀다. 슬레타도 덩달아 놀라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니카는 그저 빙긋 웃어 보이더니 다시 마스크를 올렸다. 슬레타는 아직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니카와 츄츄를 번갈아 쳐다봤다.
“왜 니카 씨가 여기에……?”
“편지 줬더니 너랑 할 얘기가 있다 해서…….”
츄츄도 이유를 명확히 아는 건 아닌 듯했다. 하긴 편지 하나 전달해줬다고 아이돌이 직접 만나러 오는 상황을 이해하긴 쉽지 않을 테다. 다행히 니카는 본론을 머뭇거리지 않았다.
“이거 미오리네한테 전해달라 했죠.”
니카의 품에서 나온 건 슬레타가 쓴 편지였다. 슬레타의 글씨체로 ‘祈完快’라고 큼지막하게 적혀 있어서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슬레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럼 아직 미오리네 좋아하는 거예요?”
“저는 미오리네 씨 말고 다른 아이돌 좋아한 적 없어요…….”
소심하지만 솔직하게 답하자 선량한 눈동자가 슬레타의 표정을 살핀다. 관찰당하는 기분에 몸을 움츠리자 니카가 손을 내저으며 사과했다.
“아, 미안해요. 잠깐 뭐 좀 생각하느라…… 괜찮다면 어디 좀 같이 가줄 수 있을까요?”
“예? 어딜요?”
니카가 벗었던 선글라스를 다시 착용한다. 머리카락 색보다 조금 더 짙은 푸른색의 렌즈도 어떤 결심을 굳힌 눈빛을 다 가리지는 못했다.
“미오리네 보러요.”
츄츄를 먼저 돌려보낸 후, 니카는 슬레타를 태워 고층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차를 타고 달릴 때만 해도 자신이 앉아 있는 곳이 니카의 차 안인지 꿈속의 상상인지 확신하지 못하던 슬레타는 차에서 내리고 나서야 덜컥 겁이 났다.
“저어, 이래도 되는, 거예요……?”
아파트의 경비는 삼엄했다. 차를 대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서는 모든 단계가 외부인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남이 어디 사는지 그다지 관심 없는 슬레타도 이름을 들어본, 유명인들이 사는 것으로 잘 알려진 아파트. 슬레타가 들어올 곳이 아닌 것만 같았다. 불청객이 된 느낌에 자꾸만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조심스러운 물음에 앞장서던 니카가 슬레타를 돌아본다. 니카는 건물 안에 들어서고부터 모자와 마스크, 선글라스를 모두 벗어 슬레타가 익히 아는 그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슬레타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시선을 피하며 뺨을 긁는다.
“사실 소속사에선 괜찮아질 때까지 그냥 놔두라고 하긴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난 이게 정답인 거 같아서요.”
소속사가 허락해주지 않은 일이라는 소리에 슬레타는 더욱 불안해졌다. 그, 팬을 이렇게 사적으로 만나면 안 좋지 않나요……. 츄츄가 들으면 어른이 되어선 왜 그리 소심하냐고 타박할 것 같은 목소리로 때늦은 불만을 제기해본다. 니카는 불쾌한 기색 없이 맞받아쳤다. 그건 맞는데, 미오리네는 좀 다르게 생각할 거예요. 미오리네는 왜 다르게 생각할까 고민하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32층에 도착했다.
문 앞에 선 니카가 초인종을 눌렀다. 하지만 한참 기다려도 답은 없다. 니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더니 한 번 더 벨을 눌렀다.
“미오리네,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잠깐만 나와주지 않을래?”
상냥한 음색에도 여전히 응답은 없다. 몇 번 더 같은 일을 시도하던 니카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미오리네임이 분명한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초인종과 전화 다음에는 메시지를 시도할 셈인지 양손으로 핸드폰을 붙잡고 화면을 두드리던 니카가 문득 ‘아니다.’하고 고개를 들었다.
“슬레타 씨, 미오리네 불러볼래요?”
“네? 제가요?”
니카는 그게 아주 좋은 묘안이라는 듯이 느리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슬레타는 반신반의하면서도 문 앞으로 다가가 벨을 눌렀다. 미오리네 씨! 저 슬레타인데요……. 문 너머는 묵묵부답이다. 슬레타는 한층 자신 없어진 목소리로 문을 두드려보았다. 계세요? 미오리네 씨. 변화는 없는 것 같다. 정말 집에 있는 건 맞는 걸까? 무럭무럭 커지는 의구심에 의문을 표하려던 찰나, 난폭한 기세로 열린 문이 슬레타의 코앞에서 멈춰 섰다.
“우왓!”
“……!”
하마터면 코뼈가 부러질뻔한 슬레타는 황급히 뒤로 물러서다가 니카를 밀어 넘어트렸다. 헉, 괜찮으세요? 죄송해요! 니카를 다시 일으켜 세우며 슬레타는 문에서 튀어나온 집주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굳어버리고 말았다.
“어…….”
미오리네는 자기관리가 철저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편한 자리라도 몸가짐을 흐트러트리지 않아서 멤버들이 청소에 서툰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로봇이라고 의심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정도였다. 슬레타 역시 데뷔 때부터, 아니 데뷔 전부터 미오리네를 좋아했지만 단정하지 못한 미오리네를 본 적이 없었다. 팬덤 사이에서도 미오리네는 장거리 비행에도 기본적인 메이크업과 스타일링을 포기하지 않는 프로 아이돌로 유명했던 것이다.
그런 만큼 눈앞의 미오리네가 주는 충격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머리카락은 지저분하게 뭉친 채 뻗쳐 있었고, 복장도 허술했다. 한쪽 어깨끈이 흘러내린 민소매와 다 구겨진 돌핀팬츠. 놀란 눈으로 슬레타를 보던 미오리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삽시간에 눈가와 코끝이 붉어진다.
“뭐야, 왜 왔는데…….”
언뜻 예민하게 들리는 말투에는 눈망울처럼 물기가 가득했다. 처음 보는 미오리네의 약한 모습에 슬레타도 코가 시큰했다. 남들보다 눈치가 한 박자 느린 슬레타여도 여기서 니카가 불러서 왔다고 말하면 안 된다는 사실쯤은 알았다. 그래서 슬레타는 진실 대신 진심으로 대답했다. 미오리네 씨가 걱정돼서요. 니카가 슬레타를 거들었다.
“네가 너무 걱정돼서 편지까지 쓰셨대. 둘이 잘 얘기해볼래?”
미오리네는 니카가 건네는 편지를 받아들었다. 의도하고 받았다기보다는 무의식중에 한 행동 같았다. 손에 들린 게 뭔지도 모르는 듯 멍하던 미오리네는 이윽고 편지를 내려다보며 가늘게 입술을 떨었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에 저도 모르게 엉거주춤 일어서자 니카가 등을 떠밀었다. 초조하게 뒤돌아보자 힘내라는 듯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뭘 힘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미오리네를 울게 놔둘 수는 없었다.
니카에게 눈인사를 하며 조심스레 미오리네의 어깨를 감쌌다. 마른 어깨는 조금만 힘을 줘도 바스러질 것 같아서 덜컥 겁이 났다.
슬레타는 조심스레 문 안쪽으로 미오리네를 이끌었다. 현관문이 덜컹거리며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그때껏 편지 봉투 위에 못박혀있던 미오리네의 은색 눈이 슬레타를 향했다.
“걱정하는 척하지 마. 이제 나한테 관심도 없으면서.”
“아, 아니에요. 제가 왜 미오리네 씨한테 관심이 없어요.”
“거짓말!”
미오리네가 목소리의 톤을 한껏 높이며 슬레타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순간적인 기세는 흉흉했으나 무리해서 기운을 끌어 쓴 건지 그 직후 바로 휘청댄다. 황급히 미오리네를 부축하고선 앉을 곳을 찾았다. 현관이 길어 안쪽이 보이지 않는다. 급한 대로 바닥에 먼저 양반다리로 앉은 후 제 위에 미오리네를 앉혔다.
“미오리네 씨 제가 경솔했어요. 근데 저 진짜 갈아탄 거 아니에요, 믿어주세요. 저 사정 설명하려고 편지도 썼어요!”
흡사 애원하는 듯한 말투에 미오리네가 다시 한번 손에 쥔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미오리네가 못 미더워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슬레타는 미오리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조심하며 편지에 손을 대 봉투 윗부분을 뜯어냈다. 혹시나 손을 쳐내지 않을까 싶었는데 다행히도 미오리네는 슬레타의 몸에 등을 기대며 내용물을 꺼냈다.
슬레타는 한시름 놓으면서도 두툼한 편지 두께에 창피해졌다. 읍소문을 쓴 것까진 괜찮았는데 그걸 읽는 미오리네를 실시간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한 번 머쓱한 감정을 자각하자 현관 앞, 무릎 위에 미오리네를 태운 것까지 의식하게 됐다.
“저기, 의자에 앉아서 보는 게 편하지 않으시겠어요?”
“가만 있어.”
“넵…….”
슬레타는 얌전히 양손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미오리네가 슬레타를 흘끔 곁눈질했다.
“……무거워?”
“너무 가벼워서 무서울 정돈데요…….”
작고 말라서 요정 같다는 생각은 해봤어도 연약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막상 실제로 안아보니 조금만 부주의하게 행동해도 상처 입힐 것만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로까지 약해진 건, 아마 며칠간 밥도 제대로 먹지 않은 거겠지. 슬레타는 흰 목선과 그에 이어지는 가녀린 어깨를 안쓰럽게 눈에 담다가 문득 미오리네의 체취를 인식했다.
미오리네는 며칠간 정상적인 생활과 거리가 먼 시간을 보낸 게 분명했고, 샤워는 필연적으로 가장 먼저 무시되는 루틴이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불쾌함부터 느꼈을 텐데 슬레타는 어딘가 아득한 기분으로 조금 더 가까이 코를 가져다 대었다. 미오리네 씨는 이런 냄새가 나는구나……. 어쩐지 뱃속이 근질근질했다.
“너.”
“네, 넷!”
몽롱한 기분에 빠져있던 슬레타는 미오리네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남의 냄새에 심취해있다니. 그것도 잔뜩 약해진 미오리네를 상대로. 변태라고 매도당해도 변명거리가 없었으나, 그런 속내를 알 리가 없는 미오리네는 다 읽은 편지를 바닥에 내려두며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럼 아직 내가 좋은 거지?”
“네! 제일 좋아해요! 미오리네 씨만 좋아요! 아, 물론 아카시아 멤버들도 좋아하지만, 그건 미오리네 씨가 있는 팀이라서고,”
열렬히 마음을 표현하는 도중 미오리네가 말허리를 잘랐다.
“그럼 걔네 찍을 때 왜 그렇게 웃고 있었어?”
“걔네요? 아…, A그룹 B 씨요?”
“그렇게 친근하게 부르지 마.”
“예?”
어리둥절해 반문했지만 미오리네는 옷을 꾹 쥐며 답을 재촉할 뿐이었다. 딱히 숨길 것이 없었던 슬레타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1위하고 우는 모습이 기특해 보여서 그랬어요. 꼭 좋아하는 그룹이 아니더라도 잘 되는 거 보면 기분 좋잖아요. 미오리네의 눈이 한참을 슬레타의 얼굴 위를 떠돈다. 사실 여부를 감별하는 눈빛이었다. 자신의 마음에 한치도 거짓이 없던 슬레타는 당당하게 미오리네를 마주 보았다. 이내 시선이 툭 어긋나며 미오리네는 힘없이 슬레타의 품에 고개를 떨궜다.
“내가 좋다고 말해.”
“미오리네 씨가 좋아요!”
“또.”
“미오리네 씨가 최고입니다!”
“한 번 더.”
“미오리네 씨는 우주 최고 아이돌!”
하아……. 미오리네가 의미 모를 한숨을 내쉬더니 슬레타의 목에 팔을 둘러왔다. 슬레타는 반사적으로 허리에 팔을 어 미오리네를 마주 안았다.
“갈아타면 안돼……, 난 너 때문에 아이돌 하는 거란 말이야…….”
저 안 갈아타요.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는 것이 기뻐서 대답은 확신이 됐다. 그러면서도 미오리네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지 알아주었으면 해서 슬레타는 부드럽게 미오리네의 등을 쓸어주었다.
“다른 사람들도 미오리네 씨를 기다리고 있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오리네 씨를 좋아하는데요.”
뜻밖에도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 너만 중요해.”
“에, 그, 그치만, 다른 팬들도 저만큼 미오리네 씨를 소중하게 여겨주고 있어요.”
“그러니까 필요 없다고 하잖아.”
슬레타의 예상을 한참 벗어난 태도였다. 슬레타를 소중히 여기는 만큼 다른 팬들에 대한 애정도 크게 와닿을 거라고 믿었는데 미오리네의 태도는 막무가내에 가까웠다. 알맞은 정답을 찾을 수가 없어서 어벙하게 우물대고 있자 미오리네가 홱 고개를 들었다. 안정을 찾은 듯했던 얼굴이 또다시 사납게 일그러졌다. 난데없이 주먹이 날아들어 가슴을 쳤다.
“너 진짜 바보야? 아직도 내가 팬 하나 때문에 이런다고 생각하는 거야?”
“에, 엑, 왜, 왜 때려요……?”
험한 일을 모르는 게 분명한 주먹은 몇 대를 두드리든 아프지 않았으나 그 행위 자체가 슬레타를 당혹하게 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맞을만한 짓을 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미오리네를 뿌리치는 건 쉽겠지만 슬레타는 일단 가만히 맞아주었다. 조금 전의 경험으로 미오리네의 연소가 격렬할지언정 오래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미오리네는 제풀에 지쳐 씨근대며 손을 멈췄다. 그쯤 되자 슬레타는 반강제로라도 미오리네에게 뭔가를 먹이고 재워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가뜩이나 약해진 상태인데 계속 화를 냈다간 정말 쓰러질 것만 같았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슬레타가 미오리네의 분노를 부추기는 듯하니, 오해도 풀었겠다 슬슬 슬레타는 사라져주는 게 낫지 않을까. 슬레타가 어떻게 해야 미오리네가 뭐라도 좀 먹게 할 수 있을까 고민에 돌입하려는 찰나 숨을 몰아쉬던 미오리네가 어딘가 체념한 얼굴을 했다.
“네가 좋아.”
“어…, 네……?”
“네가 좋다고! 네가 좋은데 넌 날 아이돌 아니면 안 만나줄 것처럼 구니까, 아이돌이 아닌 나는 관심 없어 보이니까……!”
슬레타는 멀뚱멀뚱 미오리네의 얼굴을 보았다. 미오리네의 외침을 분명히 알아들었지만 그 절박함을 가슴으로 소화하기엔 벅찼던 탓이다.
내가 좋다고? 그야 나도 미오리네 씨가 좋은데. 그런데 아이돌 이야기는 왜 하시는 거지. 그럼 꼭 아이돌과 팬이 아니라 다른 의미로 좋다고 하는 것 같잖아…… 너무 느린 이해와 함께 경악이 찾아왔다. 슬레타는 질겁하여 외쳤다.
“네?! 저를 어쨌다고요?!”
“널 좋아한다고! 네가 아니었으면 아이돌 같은 걸 계속했을 거 같아!”
확인사살이 날아와 꽂혔다. 꿈에 나와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웃고 넘겼을 상황이 정면에서 슬레타를 가로막았다. 미오리네가 고작 자기를 좋아한다는 말도, ‘아이돌 같은 거’라고 표현한 사실도 전부 머리가 울릴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미오리네에 옆에 서는 사람은 세상에서 제일 돈 많고 제일 잘생기고 제일 다정한 사람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슬레타는 돈도 없고 너구리처럼 생겨서는 눈치도 없다. 미오리네의 1호팬으로서 소중히 여겨지는 건 아무 잡념 없이 기뻐할 수 있었지만 연애 감정으로 인식되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치명타인데 사실은 아이돌을 하기 싫었단 뉘앙스까지 추가타를 먹이자 슬레타는 정말 기절하고 싶어졌다.
알았으면 뭐라고 말 좀 해봐. 미오리네가 초조하게 손을 뻗었다. 충격의 늪에서 헤엄치고 있던 슬레타는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뺐다. 갑작스레 다가온 외부 자극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그 간단한 행동이 칼날보다 더 예리하게 미오리네를 베었다는 건 표정을 보고 나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입술을 깨물며 부들부들 떨던 미오리네가 푹 고개를 숙였다. 지저분한 앞머리 아래로 눈물의 궤적을 발견한 슬레타는 헛숨을 삼켰다. 미오리네는 다른 멤버들이 다 우는 순간에도 눈물을 보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놀라서 한쪽 손으로는 미오리네의 얼굴을 감싸며 다른 손으로는 등을 토닥였다. 우, 울지 마세요. 병 주고 약 준다고 생각했는지 미오리네는 그렁그렁한 눈으로도 슬레타를 째릿 노려보았다.
매서운 눈빛에 슬레타는 몸을 움츠렸다. 영락없이 또 혼나겠구나 싶었는데 뜻밖에도 미오리네는 슬레타의 손목을 연약하게 붙잡고선 작은 뺨을 비볐다. 손을 적시는 눈물은 달아오른 체온 때문에 유독 뜨거웠다.
“받아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자꾸 다정해? 왜 안아주는 거야…….”
가뜩이나 초췌하던 뺨은 눈물에 젖자 훨씬 더 볼품없는 모습이 되었다. 무대 위의 반짝임과는 아득히 먼 초라함이었지만 그 순간 슬레타는 기묘한 감동을 받았다. 미오리네가 온전히 손 안에 있는 느낌. 미오리네의 체취에 심취했을 때보다 더 뱃속이 근질거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근질거림으로부터 소중하게 달래주고 싶다는 상반된 감정이 치밀어올랐다.
슬레타는 발간 뺨에 입술을 대고 피부에 맺힌 물방울을 삼켰다. 초월적인 의지에 조종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충동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저지른 일이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눈물 자국을 혀로 핥아 올라갔다. 혀끝에 눈꼬리의 요철이 닿자 그곳에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어느샌가 슬레타의 입술도 미오리네의 피부와 온도가 같아져 있었다.
눈가와 입술이 맞닿았다 떨어지며 젖은 소리를 만들어냈다.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앗, 어, 엣……,”
“…….”
“아니 그, 헉……!”
슬레타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홱 고개를 뒤로 뺐다. 자신이 저지른 짓을 믿을 수가 없어 입이 벌어졌다. 미오리네가 눈을 크게 뜨고 그런 슬레타를 지켜보고 있었다.
“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이러면 안 되는, 윽……!”
슬금슬금 물러서는 슬레타에게 미오리네가 덮치듯 몸을 던졌다. 다치지 않게 받아내자마자 제법 힘이 들어간 치아가 아랫입술을 물어뜯었다. 아무리 두 사람의 힘 차이가 명백해도 입술을 물어뜯기자 눈물이 찔끔 나오게 아팠다. 미오리네의 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작고 말캉한 혀가 방금 전 물어뜯은 아랫입술을 핥더니 그 안쪽으로 밀고 들어오려고 안간힘을 썼다. 키스라고 하기엔 너무나 공격적인 행위였지만 슬레타를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이대로 입을 벌려 미오리네의 혀를 받아들이고 싶은 걸 넘어, 자신 쪽에서 밀어 넣고 얽히고 싶었다. 물어뜯긴 입술이 아프지만 않았어도 얼굴을 핥았을 때처럼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달려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힘을 써 미오리네를 밀어냈다.
미오리네는 밀리고 나서도 포기하지 않고 슬레타에게 재차 달려들려고 했다. 막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포기하게 하는 건 쉽지 않을 듯했다. 말리려고 양팔을 잡았는데 엄청나게 얇았다. 그리고 제 딴엔 힘을 준다고 주는 듯했지만 지진으로 따지면 진도 1이 될까 말까 한 작은 진동만이 전해질 뿐이었다. 아 너무 작고 약해! 슬레타는 갑자기 엄청나게 괴로워졌다. 그리고 확신했다. 여기서 제대로 말리지 않으면 미오리네가 아니라 슬레타 본인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리란 걸.
“미…, 미오리네 씨……! 저 여기서 더 늦게 들어갔다간 진짜 집에서 쫓겨나요!”
미오리네의 의지를 꺾는 게 먼저였기에 슬레타는 떠오르는 대로 마구 외쳤다. 아무 말이나 주워섬긴 것이었는데 의외로 먹혀든 것인지 미오리네의 움직임이 주춤한다.
뜻밖의 타개책을 찾아낸 슬레타는 줄줄이 변명을 읊기 시작했다. 우리 언니 엄할 때는 진짜 엄하거든요. 저 지금도 언니 속이고 나온 거라서 들키면 진짜 혼나요! DZK도 못 가게 될지도 몰라요! 아니 아예 외출 금지가 떨어질 수도 있어요. 식비조차 안 줄지도 모르고……! 사실과 과장이 섞인 외침에 미오리네의 몸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마침내 미오리네가 떨어져 나갔다. 미오리네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뚱한 표정이었다.
“무슨 언니가 성인인 동생을 이렇게까지 통제해? 부모가 이래도 어이없을 마당에. 이상한 사람이네.”
“저, 저희 언니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고등학교까지 중퇴하고 일을 해서 절 먹여 살린 데다가 지금까지도 절 돌봐주고 이끌어주는 소중한 가족이에요…….”
“아 그래……? 훌륭하신 분이었구나…….”
얼떨떨하게 말을 흐린 미오리네는 조금 기세가 꺾였다. 부모님이 안 계신지는 몰랐어. 미안해. 슬레타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고, 미오리네는 팔짱을 낀 채 잠시 말이 없었다. 짧은 침묵 끝에 다시 말을 시작했을 때는 한층 차분해진 목소리였다.
“언니가 자격증 딸 때까진 나 못 보게 한다고? 돈도 안 주고?”
“네, 넵.”
“그래도 어떻게 DZK 보러 오는 건 허락 맡았고.”
“그때까지 돈은 제가 직접 벌어야 하지만요.”
“그리고 너 내 얼굴 핥았어.”
“그건…, 그게……, ……죄송해요.”
겸연쩍어 할 말이 없어진 슬레타에게 미오리네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또 그 애매한 몸싸움이 시작되는 걸까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지만 미오리네는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 서고선 슬레타의 손을 잡았다.
“나랑 사귀자.”
슬레타는 차라리 몸싸움을 한 번 더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침울하게 아무 말 않고 있자 미오리네가 덧붙였다. 나랑 사귀면 콘서트 오기도 훨씬 더 편해질걸? 네 언니도 설득하기 더 쉬워질지도 몰라. 굉장한 유혹이었으나 그래도 슬레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럼 무슨 문젠데.”
“패, 팬이랑 사귀는 아이돌이 무슨 소리 듣는지 미오리네 씨도 아시잖아요. 저는 미오리네 씨가 더 높은 곳에서 더 오래 빛났으면 좋겠어요. 저 때문에 그게 힘들어지거나 불가능해지는 건 싫어요.”
“근데 내 얼굴 핥았잖아.”
“그니까 그건 저도 모르게, 아 제발요.”
“네가 나라면 명백한 가능성을 봤는데 이대로 물러설 거 같니?”
슬레타라면 그럴 수도 있겠으나 미오리네는 그러지 않을 거 같았다. 슬레타는 큰맘을 먹고 타협안을 내놓았다. 제가 자꾸 눈에 보여서 흔들리신다면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덕질할게요. 물론 갈아타거나 팬을 관두는 건 아니구……. 상당히 양보한 타협안인데도 미오리네는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손등을 꼬집었다.
“그럼 나 아이돌 안 해.”
“네?”
“나 원래 아이돌 제대로 할 생각 없었어. 너 때문에 지금까지 아이돌 한 건데 네가 거리를 두면 내가 계속할 이유가 뭐 있어.”
오늘 들은 소리 중에 가장 충격적인 소리였다. 미오리네가 아이돌을 안 한다니. 아이돌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이돌을 안 한다니? 슬레타는 무의식적으로 언성을 높였다.
“그,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안 보인다느니 그런 소리 좀 하지 말라고!”
마주 목소리를 높여 맞받아친 미오리네가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본인이 많이 봐준다는 식의 태도로 몸을 물렸다. 빛을 잃고 초췌하던 모습에 어느샌가 평소의 불꽃이 돌아와 있었다.
“좋아, 지금 당장 사귀지 않아도 돼. 대신 나랑 계속 만나줘. 일주일에 한두 번이라도 괜찮으니까. 물론 공부에 방해되게 하진 않을게. 하지만 그게 안 된다면.”
미오리네는 그게 안 된다면 어떻게 될지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다. 명백하게 본인의 아이돌 생활을 건 협박이었다. 너무해요……. 슬레타가 울먹거리는데도 미오리네는 오히려 점점 생기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좋아, 거래 성립이야. 미오리네가 멋대로 결론을 내리며 당당하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이게 안 사귀는 게 맞는 걸까……?
슬레타는 식탁 앞에 앉은 채로 고민에 빠졌다. 그런 슬레타 앞에 접시를 푸짐하게 채운 아마트리치아나가 놓인다. 미오리네가 슬레타를 위해 만들어준 저녁 식사다.
일주일에 한두 번 만나는 것도 괜찮다던 미오리네의 말은 최소 한두 번은 반드시 만나야 한다는 의미였다. 미오리네는 본인이나 슬레타에게 별다른 일이 없는 이상 매일 만나고 싶어 했다. 너는 내 영상이나 사진 매일 봤을 거 아냐. 근데 나는 사인회 아니면 네 소식 접할 일이 없었는데 이 정도는 해야 억울하지 않지. 태연자약한 얼굴로 그런 주장을 한 미오리네는 거의 매일 슬레타를 만나러 왔다.
공부에 방해되지 않겠다는 말은 순수하게 진심이었는지 미오리네의 방문은 독서실을 왔다 갔다 할 때 태워주거나 밥을 챙겨주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의 가까운 거리감이 매일같이 반복된다는 사실에 슬레타는 아직 완벽히 적응하지 못한 상태였다. 내가 미오리네 씨와 매일매일 사적인 대화를 나누고, 미오리네 씨가 차려주는 밥을 먹는다니……. 더 심각한 문제는,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마음이 미오리네의 기뻐하는 얼굴을 볼 때마다 연료가 다 떨어진 랜턴 불빛처럼 희미해진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부하는 연인과 뒷바라지하는 직장인 여자친구 관계잖아. 팬이 아이돌을 서포트해줘야 하는데 상황이 반대가 됐다. 우울한 생각을 하면서도 파스타를 포크로 둘둘 말아 한입 넣었다. 맛있었다. 방송에서 한 번도 요리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 몰랐는데 미오리네는 요리를 잘했다. 나 남이 해준 요리 먹는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 그래서 내가 해서 먹다 보니 자연스레 실력이 늘더라고.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슬레타는 미오리네가 해준 키슈를 우물거리며 생각했다. 그럼 내가 해준 요리도 싫으실까? 미오리네 씨만큼 맛있게 할 자신은 없어도 나중에 같이 살게 되면 나도 대접해주고 싶은데……. 무의식중에 동거까지 사상했다가 저 혼자 내상을 입은 슬레타는 그날 밤 다이어리에 반성문을 쓰다가 잠들었다.
“입맛에 맞아?”
아직 입안에 든 것을 다 삼키지 못했던 슬레타는 얼굴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빙긋 웃는 미오리네에게서는 처음 집에 방문했던 날의 연약함과 처량함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커피잔을 든 미오리네가 아주 당연하다는 태도로 식탁과 슬레타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무릎 위에 앉았다. 둘이 있을 때의 미오리네는 도통 의자에 앉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처럼 굴었다. 혹은 슬레타를 의자로 알고 있거나. 머그잔에 든 커피가 흐르지 않도록 조심스레 팔을 비켜준 슬레타는 미오리네의 머리카락에서 설핏 풍기는 샴푸 향을 맡으며 어딘가 아쉬운 기분을 느꼈다.
“미오리네 씨는 저녁 안 드세요?”
“응, 오후에 군것질을 했더니 배가 안 고파.”
작은 체구답게 미오리네는 그다지 많이 먹지 않았다. 아이돌이니만큼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맘고생으로 빠진 체중이 다 회복되지 않은 것 같아 걱정이 남았다. 손이 느려진 것을 눈치챈 미오리네가 품 안에서 고개를 들었다. 왜 안 먹어. 먹여줘? 슬레타는 황급히 괜찮다고 사양하며 포크를 움직였다. 미오리네가 무릎에 타고 있어 밥을 먹기 불편했지만 항의해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걸 지난 몇 주간 배웠다.
같이 있는 시간은 짧았으나 그래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하는 입장이었던 미오리네는 슬레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궁금해했다. 좋은 언니를 둔 덕분에 조실부모한 후에도 큰 굴곡 없이 살아온 슬레타의 인생에는 스펙타클한 사건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있는 스펙타클이라곤 대부분 미오리네와 관련 있다. 그럼에도 미오리네는 슬레타의 평범한 일상을 열심히 귀담아들어 주었다.
반면 미오리네는 슬레타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말하는 일화마다 슬레타는 상상도 못해본, 혹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겨우 본 요소들로 가득했다. 슬레타는 미오리네가 뭔가를 말해줄 때마다 경악하거나 감탄하기 바빴지만 정작 본인은 늘 시큰둥했다. 아이돌이 된 이유? 아빠가 너무너무 하기 싫은 걸 시켰는데 도망칠 방법이 그것뿐이었거든. 기획사 사장이 친구 아버님이고, 친구가 내 얘기를 전달해줘서 일단 연습생 핑계로 집에서 나왔는데…… 이 나쁜 놈들이 날 진짜로 아이돌 데뷔 시켜서 써먹을 생각이었던 거야. 어쨌든 이런저런 사정으로 바로 그만두진 못하고 1-2년만 하려고 했는데 널 만났어.
슬레타는 미오리네가 자신 때문에 아이돌을 계속했다는 사실은 기뻤지만 슬레타만 아니었다면 언제든 그만둘 일로 취급하는 것은 슬펐다. 미오리네의 행복이 아이돌 생활에 있지 않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슬레타는 무대 위의 미오리네를 아주 좋아했기 때문이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본인의 이야기를 전하던 미오리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슬레타가 상심했음을 알아차렸는지 슬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슬레타, 나도 팬들한테 고마운 마음은 있어. 감동해서 울컥할 때도 있고.”
“그, 그쵸? 미오리네 씨도 무대에 서는 거 좋죠?”
“근데 그런 거 다 합쳐도 네가 더 중요할 뿐이야.”
기쁘면서도 죄책감이 드는 복잡한 심경이 또다시 슬레타를 반겼다. 미오리네와 사적인 만남을 시작한 이후로 복잡미묘한 감정의 요동이 잦았다. 미오리네는 슬레타의 팔을 만지작거리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너 때문에 예상보다 오래 하고 있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싫은 걸 참는 건 아니야. 멤버들도 다들 착한 애들이고, 이거 아니면 꼼짝없이 결혼했을지도 모르고…….”
“네? 결혼요?”
“아, 정확힌 약혼이야. 정략 약혼하라는 소리 때문에 집 나온 건데, 그때 기획사로 도망치지 않았다면 지금쯤 결혼했을지도 모르겠네.”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다른 사람 옆에 서 있는 미오리네를 상상하자 갑자기 명치가 쓰렸다. 슬레타의 표정을 본 미오리네가 키득키득 웃었다. 너 정말 얼굴에 다 드러나는구나. 그런 소리를 한두 번 들어본 것도 아니면서 슬레타는 괜스레 뚱하게 볼을 부풀렸다.
“제가 뭘요…….”
“상상만 해도 질투 난단 얼굴이잖아. 이러면서 내 눈에 안 보이겠다느니 그런 말을 했어?”
“그, 아니…,”
“너 내가 네 무릎에 앉는 것도 좋아하지?”
“…….”
빈말이라도 아니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슬레타의 무응답이 즐거움을 더 부추겼는지 미오리네의 목소리가 한층 밝아졌다.
“어쨌든, 곧 괜찮아졌다고 발표하고 투어 연습 들어갈 거야.”
“앗, 정말요?”
간만에 들은 희소식이었다. 상태가 나아지고도 슬레타를 챙겨준다고 계속 쉬고 있던 미오리네다. 다시 아이돌로 돌아간다는 소리에 슬레타는 반색했다.
“그래. 투어가 코앞인데 계속 놀 만큼 무책임하지는 않아. 그러니까 너도 공부 열심히 하고 나도 연습 열심히 해서 둘 다 기분 좋게 DZK 가는 거야.”
“네!”
슬레타는 저녁을 먹은 후에도 독서실에서 조금 더 공부하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혼자 들어가기에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미오리네는 손수 차를 끌고 나와 슬레타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감사합니다. 자동차 밖으로 나와 운전석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할 때였다. 슬레타?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슬레타를 불렀다. 편의점 비닐봉지를 손에 든 에리크트였다.
“어, 언니가 왜 이 시간에…….”
“맥주가 다 떨어져서 사러 갔다 왔는데…… 누구야? 비싼 차인데.”
에리크트가 몸을 기울여 슬레타의 등 뒤를 보려고 한다. 그래봤자 차 안에 있는 미오리네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슬레타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몸으로 차를 가려보려는 어림도 없는 시도를 했다. 동생의 수상한 행동에 에리크트는 무언가 깨달은 눈을 했다. 슬레타와 몹시 닮은 언니의 얼굴이 짓궂음과 흥미, 놀라움이 섞인 표정으로 번졌다.
“너…… 설마 애인이야?”
“아니 그게 좀 다른데!”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떠올리려 하는데 등 뒤에서 덜컹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슬레타는 깜짝 놀라 외쳤다. 으앗, 미오리네 씨 나오지 마세요! 에리크트의 표정이 이상해진다.
“미오리네 씨라고……?”
으앙! 나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바보 멍청이야! 자신의 입방정을 저주하는 새 슬레타의 등 뒤에서 미오리네가 슥 튀어나왔다. 어떻게 말릴 틈도 없이 슬레타의 옆에 선 미오리네가 볼캡을 벗으며 에리크트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미오리네 렘블랑이라고 합니다. 슬레타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
4년 넘게 미오리네를 봐오면서도 생전 처음 듣는 내숭 가득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에리크트의 반응이었다. 에리크트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영 모르겠다는 얼굴로 미오리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해와 함께 천천히 입이 벌어졌다. 마침내 입을 딱 벌린 에리크트가 방황하는 손짓으로 미오리네를 가리켰다.
“……???”
“그, 그게…….”
누군지 인식은 했어도, 아니 누군지 인식했기 때문에 더 정신이 아득해진 듯한 반응이었다. 두 자매를 어쩔 줄 모르는 상황으로 밀어 넣고선 미오리네는 어딘지 신난 것처럼 느껴지는 목소리로 청산유수처럼 말을 읊어 내렸다. 마치 이런 상황을 몇 번이고 상정해보았다는 듯이.
“슬레타가 더 편히 공부할 수 있게 태워다주고 있어요. 다른 길로 새는 일은 없으니까 마음 놓으셔도 되고요. 혹시 걱정되신다면 연락처도 드릴 수 있어요.”
미오리네는 정말로 자신의 연락처를 에리크트에게 주고서는 에리크트의 연락처도 받아갔다. 평소라면 이렇게 끌려다닐 에리크트가 아니었지만, 당황해서인지 미오리네가 다시 인사를 하고 유유히 사라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미오리네의 자동차마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두 자매만 휑뎅그렁하게 거리에 남았다.
“……일단 들어갈까.”
“으응…….”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에리크트는 맥주를 냉장고에 넣는 것도 잊어버린 듯 봉지를 든 채 경황없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미오리네 씨는 내가 좋대…….”
이마를 짚으려다가 그제야 봉지의 존재를 떠올린 에리크트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슬레타, 일단 가서 앉아봐. 시키는 대로 거실 소파에 앉아 기다리자 에리크트가 맥주 두 캔을 들고 돌아왔다. 치익. 캔을 따자 탄산이 빠져나오는 소리가 났다.
“얘기해봐. 지금까지 언니 속이고 연애하면서 놀러 다니고 있던 거야?”
“아니야! 그게, 조금 복잡한데……”
슬레타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거짓 없이 털어놓았다. 없는 말주변으로 상황을 설명하느라 맥주 캔에는 손도 못 댄 슬레타와는 달리 에리크트는 그새 캔을 제법 많이 비웠다. 이윽고 슬레타의 설명이 다 끝났을 때, 에리크트는 골치가 아픈 듯 머리를 벅벅 흐트러트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슬레타는. 슬레타는 미오리네 씨를 어떻게 생각하는데?”
“아, 음…….”
슬레타도 지금 미오리네와의 관계가 눈 가리고 아웅이란 건 알고 있었다. 미오리네는 이미 슬레타와 연인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고 슬레타 역시 시간문제일 거라고 느끼는 중이었다. 팬으로서의 양심만이 최후의 보루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최후의 보루가 생각보다 단단한 기반이었기에 혼란스러운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난 미오리네 씨가 계속 아이돌 해줬으면 좋겠고…, 나랑 사귀느라 아이돌 생활에 방해가 되는 건 싫은데…….”
우물쭈물 말을 시작한 슬레타는 미오리네가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 했을 때 느꼈던 명치의 쓰라림을 떠올렸다.
“그렇다고 내가 아닌 사람이랑 잘 되는 건 그것도 싫을 거 같구…….”
쓰라림을 지나 도착한 것은 처음 미오리네를 안았을 때 느꼈던 뱃속의 근질거림이었다.
“그리고 껴안으면 작고 부드럽고 몸에서 나는 냄새도 좋아…….”
좀 더 말하려던 슬레타는 멈칫했다. 에리크트가 못 볼 꼴을 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써 잤어?”
“아아아아니 아직 진짜 사귀는 건 아니니까!”
새빨개져서 마구 팔을 저었다. 설마 에리크트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동생이 어쩔 줄 몰라 하자 에리크트는 푹 한숨을 내쉬더니 팔짱을 꼈다. 생각에 잠긴 채 한참 말이 없던 언니는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얘기를 해봐야겠어.”
“응?”
“동생 연애에 시시콜콜 참견하는 언니가 되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상황이 특수하니까. 미오리네 씨랑 얘기해봐야겠어.”
어느새 에리크트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있었다. 액정을 두드리고, 화면을 귀에 가져다 댄다. 그 행동이 미오리네에게 전화를 거는 중이란 걸 미처 깨닫기도 전에 미오리네가 전화를 받는 기색이 났다.
“안녕하세요, 미오리네 씨. 조금 전 만난 슬레타 언니 되는 사람입니다. 잠깐 만나서 얘기 좀 하죠. 슬레타에 대해서요. 네…… 그러면 자세한 시간과 장소는……, 아, 그래요. 미오리네 씨가 유명하신 분이니 최대한 조용한 곳이어야겠네요. 자주 가는 곳이 있으신가요? 그럼 그쪽으로…… 전 당장 내일이라도 괜찮습니다. 네, 좋아요. 그럼 내일 저녁에 뵙죠.”
슬레타가 어버버하는 새 일사천리로 약속을 잡은 에리크트는 전화를 끊었다. 슬레타, 언니가 잘 얘기하고 올 테니까 너는 신경 쓰지 말고 공부하고 있어. 얘기해보고 알려줄게.
신경 쓰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당장 그날 밤부터 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이는데 미오리네에게서 연락이 왔다. [슬레타, 너희 언니는 어떤 사람을 맘에 들어 하니? 나 단정하게 입고 가는 편이 좋겠지?] 미오리네도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슬레타와는 좀 다른 의미 같았지만.
다음 날 오후,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아 슬레타는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에리크트는 슬레타보다 1시간은 더 늦게 귀가했다. 미오리네와 어떻게 얘기가 풀렸는지 궁금해하는 슬레타에게 그 여자 정말 말 안 통하는데 말이 통한다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해주면서.
“미오리네 씨 나쁜 사람 아니야…….”
“그래, 내 눈에도 나쁜 사람 같진 않았어.”
그러더니 떨떠름해 하면서도 덧붙였다. 그리고 널 진짜 좋아하는 거 같더라고.
얘기가 나쁘게 풀리진 않은 거 같았다. 하지만 슬레타의 안심은 때 이른 것이었다.
“그치만 역시 공부는 열심히 해야겠어. 지금보다 더.”
“어?”
“그 여자는 네가 놀고먹어도 평생 책임질 거라고 했지만 언니는 그런 거 반대야. 미오리네 씨가 부자인 건 알겠지만 그럴수록 슬레타 너도 본인의 경제력을 갖추고 떳떳해져야 해. 그리고 언니는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한 사람한테 너무 의존하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아. 내 말 이해하지?”
“으, 으응. 그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좋아. 자격증 하나만 따도 남은 당첨금은 돌려주겠다고 했지만, 이제부터는 2개 다 취득하는 걸 목표로 하자. 가산점이 이미 충분하다 해도 둘 다 따두면 이후에 교사가 된 이후에도 도움이 많이 될 거야. 어차피 지금까지 둘 다 공부하고 있었으니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돼.”
“어어……?”
앗 하는 사이 에리크트가 슬레타의 등을 두드렸다. 좋아, 힘내자 슬레타! 오늘은 맛있는 거 먹자. 저녁을 든든히 먹은 후에는 에리크트가 직접 시간표를 짜주었다. 시험이 아직 좀 남은 듯해도 방심하면 안돼. 이대로만 하면 두 자격증 다 좋은 성적으로 무난하게 통과할 수 있을 거야. 과연 남은 기간 그대로만 따른다면 높은 점수로 두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만큼 촘촘하고 빡센 일정이었다는 소리다.
에리크트의 격려를 받으며 방에 돌아왔다. 얼떨떨할 새도 없이 미오리네에게서 전화가 왔다.
[슬레타, 너희 언니한테 얘기 들었어?]
“그……,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래. 그거 말이야. 아무래도 너희 언니는 네가 나 때문에 앞일 생각 않고 늘어질까 봐 걱정되는 거 같아. 그러니까 보란 듯이 자격증을 만점으로 통과해서 그런 걱정 싹 없애버리자.]
“마, 만점이요? 굳이 그렇게까지.”
[반드시 만점을 받으라는 건 아니야. 그런데 교사가 된 이후에도 그 자격증 두 개가 있으면 경력으로도 인정해주고 일도 훨씬 편해진다며? 혹시나 교사를 그만두게 된다 해도 체육 관련 직종에서 굉장히 유리하게 작용한대. 점수가 높을수록 더 좋고. 그러니까 최대한 노력하자. 나도 네 언니만큼 네 미래를 생각하고 있어. 물론 어떤 미래든 네가 싫어지는 건 아니지만…….]
“어, 음, 그건 감사합니다…….”
[좋아, 그러면 남은 기간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공부에 집중하자. 나도 도와줄 테니까. 내가 보고 싶어져도 사진이나 영상 찾아보지 말고 차라리 나한테 연락해. 공부하는 거 봐줄 테니까. 그럼 공부도 하고 나도 보고 딱 좋지?]
“아니 그건…, 나쁜 건 아니지만…….”
[그럼 내일부터 바로 시작하자. 안녕, 잘자.]
에리크트와 미오리네가 예고한 것처럼 다음날부터 혹독한 스파르타 일정이 시작됐다. 집에서는 언니가, 집 밖에서는 최애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슬레타를 채찍질했다. 왜, 왜 둘이 이렇게 죽이 잘 맞는 거야……? 울먹여봐도 두 사람 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슬레타는 비명을 지르고 싶을 만큼 냉혹한 두 페이스메이커가 이끄는 라스트 스퍼트에 속수무책으로 시달려야만 했다.
슬레타는 감격했다.
“제가 드디어 DZK에……!”
“누가 보면 네가 공연하는 줄?”
츄츄의 핀잔에도 슬레타의 들뜬 기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이국의 공기를 느끼고자 힘껏 심호흡한다. 야, 여기가 우리 살던 곳보다 대기질 안 좋거든. 한 번 더 핀잔이 날아왔지만 슬레타는 개의치 않았다. 뭐가 됐든, 드디어 해방이었기 때문이다.
에리크트와 미오리네가 모종의 합의를 본 날 이후부터 슬레타는 정말 죽도록 공부해야만 했다. 슬레타의 장점인 집중력과 체력으로도 버거울 수준의 고강도 일정이었다. 차라리 몸을 쓰는 훈련이었다면 더 버티기 쉬웠을 텐데 앉아서 머리를 쓰는 일이라 더 고역이었다.
어쨌든 힘든 시간이 지나고 무사히 자격증 시험을 치른 슬레타는 마침내 DZK 스타디움이 있는 도시에 도착했다. 정말 길고 힘들었어……. 여기까지 오기까지의 몇 달간 겪었던 일을 회상하자 어쩐지 코끝이 찡했다.
“아무튼 고생 많았다. 결과 나올 때까지 너무 걱정 말고 놀아.”
“아, 결과 걱정은 안 해요. 두 시험 다 백 퍼센트 합격일걸요.”
츄츄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물고 있던 막대 사탕을 입에서 빼냈다.
“웬일이냐? 네가 그렇게 자신감이 넘치고.”
“모르는 문제가 없었거든요…….”
“얼씨구?”
츄츄는 장난 섞인 뻐김 취급하는 것 같았지만 슬레타는 진심이었다. 정말로 모르는 문제가 없었다. 실수만 없다면 두 자격증 다 만점일 것이다.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이런 경험을 해보겠냐는 뿌듯함과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가혹한 시험공부는 다시 하고 싶지 않다는 피로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하지만 슬레타는 발랄하게 고개를 저어 그 두 감정을 털어냈다. 이제 끝난 일이다. 남은 것은 츄츄의 말대로 걱정 없이 노는 것뿐이었다. 아카시아의 DZK 스타디움 입성까지 드디어 2일밖에 남지 않았다. 에리크트도 고생 했으니 잘 놀다 오라는 말로 슬레타를 응원했다.
출국장을 지나 공항을 벗어난 슬레타와 츄츄는 호텔에서 보내준 셔틀버스에 탑승했다. 창가 쪽 자리에 털썩 앉으며 츄츄가 묻는다. 네 지인은 뭐 하는 사람이길래 이런 호텔을 예약해주냐. 찾아보니 여기 꽤 비싼 곳이던데.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항공권과 공연 티켓만 슬레타의 자비로 계산하고 그 외는 츄츄에게 빌려야 했다. 하지만 어느 날 슬레타에게 얘기를 전해 들은 미오리네가 그걸 지금까지 왜 말하지 않았느냐며 공연 티켓은 초대권으로, 숙소는 본인 돈으로 예약해버렸다. 맘 같아서는 전부 다 내가 내고 싶지만 그러면 너도 부담스러워할 거고 에리크트도 탐탁잖아 하겠지. 그래도 이 정도는 네 친구랑 같이 여행 즐긴다고 생각하고 받아. 요약하자면 츄츄가 뭐 하는 사람이냐고 궁금해하는 슬레타의 지인은 아이돌을 하는 미오리네라는 이야기다.
당연히 츄츄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는 없어서 슬레타는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러나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그 노력은 쓸모없는 게 되어버렸다. 미오리네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츄츄의 앞에서 스스럼없이 모습을 드러내고선, 심지어 슬레타는 미오리네와 같은 방을 쓸 거라는 얘기를 태연하게 꺼냈기 때문이다.
“네?! 미오리네 씨랑 같은 방이라고요?”
“방 두 개 잡아놨다고 했잖아. 뭐야, 그럼 내가 있는데 다른 사람이랑 자려고 했어?”
“미오리네 씨,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을 자제해주세요……. 저는 당연히 저 하나, 츄츄 선배 하나, 이렇게 두 개라고 생각했단 말이에요.”
“틀린 생각은 아니네. 친구 방은 따로니까.”
슬레타의 항의를 대수롭지 않게 넘긴 미오리네가 슬레타의 등 뒤로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밀었다.
“니카 좋아한다고 들었어. 이건 선물이야. 니카한테 부탁해서 얻어온 거니까 마음에 들 거야. 공연 잘 즐기고 슬레타랑 잘 놀다 갔으면 좋겠네.”
뒤돌아본 곳에는 처음 미오리네와 마주했을 때의 에리크트와 아주 흡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츄츄가 있었다. 너무 놀라 아무 반응도 못 하는 츄츄에게 떠넘기다시피 쇼핑백을 들려준 미오리네는 안절부절못하는 슬레타를 보고 픽 웃었다.
“어차피 이 친구한테도 오래 못 숨겼을 텐데 뭘 그리 당황해.”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는…….”
에리크트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일부러 모습을 드러냈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미오리네는 그 의심을 더 깊게 만들어주는 미소와 함께 연습하러 가야 한다고 자리를 떠났다. 편한 옷으로도 다 숨겨지지 않는 작은 뒷모습을 보며 슬레타는 다시금 머리가 아팠다. 미오리네 씨…… 쿨하고 다정하신 줄만 알았는데 정말 제멋대로고 손 많이 가셔……. 그때, 츄츄가 팔꿈치로 슬레타를 퍽 쳤다. 불시의 습격에 슬레타는 악 소리를 질렀다.
“야 뭔데? 무슨 상황인데 이거?”
“아 저기…, 그, 그렇게 됐어요.”
“아니 그렇게 된 게 뭐냐고!”
놀란 마음을 불호령으로 해소하려는 친구 때문에 슬레타는 한참이나 진땀을 빼야 했다. 슬레타의 설명을 다 들은 츄츄는 질린 얼굴을 했다. 야 너 이거 다른 팬들한테 들키면 아카시아 망한다. 공주님이 유난스러운 개인팬 제일 많은 거 알지? 슬레타의 불안을 정확히 짚어주는 지적에 슬레타는 오히려 위안을 받았다. 미오리네는 말할 것도 없고 에리크트도 이런 고민에 공감해주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슬레타는 호텔 주변의 카페에 앉아 츄츄에게 그동안 속 끓였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남의 연애 이야기에 관심없는 걸 넘어 싫어하는 츄츄였지만 좋아하는 아이돌이 걸린 문제라 그런지 굉장히 심각하게 들어주었다.
“꼴값은 제발 안 들키게 해라, 제발 좀.”
“저도 그러고 싶어요!”
츄츄는 불신의 눈빛으로 쯧쯧 혀를 찼다.
“공주님이 안 그렇게 생겨서 유난이긴 한데, 너도 그러고 싶은 건 맞냐? 내가 보기엔 너도 이미 넘어갔는데 뭘. 솔직히 너니까 내가 가만 있는 거지 다른 사람이 이랬으면 화냈어.”
“으…….”
“네가 받아주기는 다 받아주는데 아직 사귀는 건 아니라는 태도로 나오니까 더 꼴값인 걸지도 모르지.”
생각해본 적 없는 관점이었다. 슬레타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그럴까요?”
“몰라? 그냥 찍어봤어.”
“츄츄 선배애…….”
낙담하여 테이블 위에 축 늘어지자 츄츄가 킥킥 웃었다. 야, 애초에 나한테 뭘 바라냐. 공주님이랑 직접 이야기해보는 게 빠르지. 역시나 별 고민하지 않고 던지는 말이었겠지만 슬레타는 그게 핵심을 찌르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온종일 츄츄와 아카시아에 관한 이야기나 미오리네와의 관계에 대해 잔뜩 말한 뒤 호텔로 돌아온 슬레타는 상당히 홀가분해진 기분이었다.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일을 편하게 다 털어놓은 것만으로도 기운이 났던 것이다. 일이 어떻게 흘러가도 츄츄는 자신의 친구로 남아줄 것이라는 믿음도 용기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뜻밖에 좋은 해답도 얻어냈다.
미오리네 씨가 돌아오면 진지하게 얘기해봐야겠어. 팬과 아이돌 관계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미오리네는 제멋대로고 손이 많이 갔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다정하고 속이 깊었다. 슬레타가 앞으로의 관계를 진지하게 상담하고자 한다면 마냥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오리네는 공연 직전의 마지막 연습으로 바쁜 건지 첫날에는 슬레타가 잠이 들 때까지 호텔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보이지 않았지만 옆자리가 조금 흐트러져 있어 잠깐이나마 머물다 갔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대신 그 다음 날에는 슬레타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오리네도 호텔로 돌아왔다.
“왜 이리 일찍 돌아왔어? 더 놀다 오지 않고.”
“앗, 내일 굿즈 사고 공연 보고 서로 얘기하고 그러려면 오늘은 쉬면서 체력 보충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얘는. 굿즈 같은 건 그냥 나한테 달라고 해.”
“현장에서 사는 재미가 있단 말이에요!”
팬의 심리를 모르는 가수에게 반박한 슬레타는 조금 기세를 죽였다. 그래도 못 구하는 굿즈가 생기면 부탁드려도 될까요? 미오리네가 미소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도 오늘은 컨디션 관리 때문에 일찍 왔어. 내일이 바로 공연이니까.”
“…….”
어제 생각해뒀던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기엔 절호의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슬레타는 그 ‘진지한 이야기’에 대한 생각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말이 없어진 슬레타를 보며 미오리네가 갸웃한다.
“슬레타?”
“아니, 저, 미오리네 씨, 냄새나네요…….”
슬레타를 전용 의자쯤으로 아는 미오리네 덕분에 슬레타는 미오리네의 체향을 맡을만한 일이 많았다. 자신감과 원기를 회복한 미오리네에게선 언제나 산뜻하고 정갈한 향이 났다. 그 역시 기분 좋은 향이었으나 슬레타는 늘 아쉬운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약해진 미오리네를 끌어안았던 날 맡았던 진하면서도 날것의 체향이 잊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 전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미오리네에게선 그날과 비슷한 냄새가 났다. 연습하느라 땀을 많이 흘리신 걸까? 이유가 무엇이든, 그리운 냄새를 다시 맡을 수 있다는 기대가 ‘미래에 대한 진지한 대화’에 대한 의지를 깨끗이 날려버리고 말았다.
미오리네 씨 둘이 있을 땐 늘 안겨 오니까 이번에도……. 슬레타가 팔을 벌려 미오리네를 안으려고 했다. 뜻밖에도 미오리네가 뒷걸음질 치며 슬레타에게서 멀어졌다.
“공연장 에어컨이 시원찮아서 땀이 좀 났어. 바로 샤워할게.”
그렇게 말하는 미오리네는 상당히 무안한 얼굴이었다. 냄새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보일 수 있는 아주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문제는 슬레타가 충격 때문에 미오리네를 살필 여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왜, 왜요?”
“왜냐니, 네가 냄새난다고 하니까,”
“그래서 좋다는 이야기였어요! 씻지 마세요!”
“뭐……?”
어쩌면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조급함이 슬레타를 섣불리 행동하게 했다. 슬레타는 황급히 미오리네를 안고 목에 코를 박았다. 그날만큼 진하지는 않아도 슬레타를 충분히 만족시킬만한 향이 폐 안을 가득 채웠다. 그날처럼 뱃속이 근질근질했다. 기묘한 충족감이 뱃속으로부터 피어올랐다.
한참을 킁킁대던 슬레타는 가볍게 어깨를 붙잡히고 나서야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미오리네와 눈이 마주쳤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힉.”
미오리네는 얼굴을 핥던 슬레타를 마주했을 때와 똑같은, 아니 거기서 좀 더 짓궂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멀리서 츄츄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내가 보기엔 너도 이미 넘어갔는데 뭘…….
“과연, 이런 취향이란 말이지?”
“아, 아아아니 잠깐만요!”
“내가 예전에도 말했던 거 같은데. 네가 나라면 이럴 때 물러설 거 같니?”
미오리네는 슬레타의 변명을 원천차단하며 상의를 벗어 던지려 하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컨디션 관리 하셔야죠!”
“뭐 한 번 한다고 대단히 체력 깎이겠어. 체육계인 너만큼은 아니라도 한 번 했다고 나뒹굴 정도는 아니거든, 나도.”
“안돼요! 한 번으로 끝낼 자신 없어요!”
슬레타는 얼굴 앞에 팔을 교차해 엑스 모양을 만들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필사즉생의 진심이었건만 마오리네는 망설임 없이 슬레타의 팔을 치워냈다.
“네가 자꾸 그런 말을 하니까 날 더 부추기는 거잖아.”
“그, 아, 그러려던 건 아닌데.”
“그냥 내일 후들거리면서 공연하지 뭐.”
이번에는 슬레타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발언이었다. 슬레타는 울상이 된 얼굴을 숨기지 않고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미오리네 씨는 제가 이 공연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면서도 제 앞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뭐라고? 아, 아니.”
기세등등하던 미오리네가 급격히 당황한다. 상황을 모면하려는 삐진 척이 아니라 진짜로 실망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리라.
“미안.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었어.”
이번에는 대충 흘려넘기지 않고 진심으로 사과해온다. 그에 그치지 않고 진짜로 이럴 생각으로 한 방을 잡은 건 아니며, 슬레타가 먼저 안아준 게 기뻐 이번에야말로 확답을 받고 싶었을 뿐이라며 걷어 올렸던 상의도 얌전히 내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슬레타가 미안해졌다. 따지고 보면 샤워하겠다던 사람을 붙잡고 킁킁댄 것도 슬레타고 지금껏 온갖 방식으로 애매한 여지를 던져준 것도 슬레타다. 슬레타도 고개를 마주 숙였다. 저도 갑자기 냄새 맡아서 죄송해요……. 잠깐의 어색한 침묵 끝에 미오리네는 다시 샤워하러 가겠다고 했고, 이번에는 슬레타도 말리지 않았다.
미오리네가 샤워하는 사이 슬레타는 본래의 목적, 그러니까 최애와 연인의 경계에 대한 심층 깊은 대화를 겨우겨우 떠올릴 수 있었다. 미오리네 씨, 얘기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샤워를 마치고 나온 미오리네에게 그렇게 운을 띄운 슬레타는 아무래도 자신은 가수 미오리네를 계속 보고 싶고 그렇기에 자기 때문에 미오리네의 연예인 생활에 흠이 생긴다면 슬플 것 같다고 전달했다. 꾸준히 해왔던 이야기지만 이렇게 진지하고 확실하게 표현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한참 말없이 듣고 있던 미오리네는 계속 만나는 건 좋지만 지금보다는 조심했으면 좋겠다는 얘기까지 마치자 시큰둥하게 느껴질 정도로 고민 없이 대꾸했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난 큰 상관 없어.”
“미오리네 씨, 좀만 더 진지하게 들어주세요.”
슬레타는 미오리네가 아무 데나 던져버린 마스크팩을 쓰레기통에 넣으며 불평했다. 나 진지하게 한 말인데? 또다시 가볍게 대꾸한 미오리네가 슬레타의 목에 팔을 감으며 안겨들었다. 가까워진 얼굴은 조금 불퉁한 기색이었다.
“내가 비슷한 고민을 몇 년이나 했는지 알아? 나는 네가 좋은데 너는 아이돌이랑 팬은 사적으로 만나면 안 된다는 소리나 하고 있었잖아. 너는 몇 달 고민한 거지만 나는 몇 년 고민한 대답이야. 너 이렇게 나올 거 진작 알고 있었어.”
“에, 그랬나요?”
“응, 그랬어.”
갑작스레 미오리네가 다리에서 힘을 뺐다. 목에 걸리는 체중을 느낀 슬레타는 황급히 허리에 힘을 주며 미오리네를 안아 올렸다. 온전히 슬레타에게 몸을 맡긴 미오리네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어떤 식으로 고민해봐도 결론은 네가 좋았어. 그냥 그게 다야. 그러니까 네가 내 옆에 있기만 하면 대놓고 공개를 하든 조심을 하든 난 아무 상관 없어.”
슬레타는 그제야 담담한 어조에 담긴 미오리네의 진심을 읽었다. 눈치가 둔한 탓에 늘 이런 중요한 사실을 알아채는 것이 늦었다.
슬레타는 미오리네가 어떤 감정으로 자신에게 열광하는 슬레타를 대했을지 추상적이나마 추측해보았다. 싫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열광이 깊을수록 정말로 원하는 감정에서는 멀어진단 걸 깨닫고는 씁쓸했을지도 모른다. 슬레타에게 확답을 받고 싶다던 미오리네의 말이 떠올랐다. 자꾸만 안기려고 하는 것도 사실 불안해서가 아닐까. 츄츄가 지적했던 것처럼, 슬레타는 미오리네를 밀어내지 않으면서도 계속 도망갈 구석을 만들고 있었으니까.
품 안의 작은 체구를 조금 더 밀착하여 끌어안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지 못햇던 용기를 끌어모았다. 슬레타가 옆에 있기만 한다면 뭐든 좋다고 했으니 이제는 슬레타가 옆에 있겠다고 말할 차례였던 것이다. 저, 저도 미오리네 씨가 좋은 것 같아요. 뱉고 나니 이번에도 회피성이 짙은 애매한 화법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보다 확실한 어휘로 한 번 더 말했다. 저도 미오리네 씨가 좋아요. 목을 껴안은 힘이 강해졌다. 미오리네가 웃는 소리가 났다. 슬레타는 그 웃음소리가 어느 때보다도 밝아서 좋았다.
조금 더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은 내일을 위해 조금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너무 기대돼요! 눈을 반짝이며 말하자 미오리네도 부드럽게 받아주었다. 준비 많이 했으니까 재미있을 거야. 나 예쁘게 찍어줘야 해. 미오리네의 은발은 어둠 속에서도 희끄무레하게 빛났으나 그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이 슬레타를 조금 더 결단력 있게 만들어주었다.
“저기…… 공연 끝나고, 한가해지시면…….”
아직 본론은 꺼내지도 않았는데도 벌써 귀가 뜨겁다. 그래도 슬레타는 끝까지 말을 마쳤다.
“아, 아까 못했던 거, 할까요……. 물론 미오리네 씨가 괜찮으시면요.”
빌미를 제공한 적은 있었어도 먼저 권유를 한 건 처음이었다. 미오리네에게서 대답이 돌아오기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슬레타는 수많은 고민을 했다. 무례하지 않게 잘 말한 걸까? 너무 센스 없었던 건 아닐까? 그리고 그 모든 고민이 무색할 만큼 미오리네의 대답은 기쁜 기색이 가득했다. 그러자. 너한테 안기면 기분 좋을 거 같아.
미오리네는 슬레타의 손을 잡은 채 금세 잠이 들었다. 숨소리만 들어도 깊고 편안한 숙면에 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미 마음을 확고하게 정한 채 상대방을 기다리던, 그리고 드디어 기다림의 결실을 본 사람의 여유일 것이다. 두근거림으로 잠을 설치던 슬레타는 그 모습을 억울하게 바라보다가 맘을 고쳐먹었다. 슬레타는 몇 달이지만 미오리네는 몇 년이다. 잠 못 드는 밤은 분명 미오리네가 더 많이 겪었으리라. 그러니까 슬레타는 더는 억울해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튼, 이제부터 미오리네와 슬레타는 같은 마음으로 함께였다.
여러분 저는 낼부터 여행을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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